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파일럿 시리즈를 통해 공유하고 싶은 것이 있다. 내가 진짜를 발견하기 위해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는가?’에 대한 이야기이다. 시각-공감각적인 태도에 대한 이야기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하려나. 물론, 세상을 보는 타인의 태도를 엿볼 수 있는 매체가 창작물이긴 하다. 영화, 음악, 사진, 글 등. 레터에서도 사진과 글을 통해 나의 태도가 묻어날 테지만, 창작물은 그 결과물이고 지금은 마음가짐과 과정에 관해 설명해보려 한다.
홍상수의 영화 <클레어의 카메라>에서 클레어는 온종일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사진을 찍고 다닌다. 그는 사진을 찍는 것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무언가를 바꿀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모든 것을 아주 천천히 다시 쳐다보는 겁니다.”
나는 ‘아주 천천히 다시 쳐다보는 것’이 ‘적극적인 의지로 살핌’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스치듯 흘려보내기 쉬운 장면도 사진을 찍기 위해, 또는 무언가를 찾아내려는 의지를 가지고 보면 분명 다르게 보이기 때문이다. 이런 태도는 현상(본질이나 객체의 외면에 나타나는 상)에 머무는 것에서 나아가 ‘경험’을 발생시킨다. 특히, 이를 통해 아름다움을 발견했다면 그건 ‘미적 경험’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천천히 다시 보기’ 행위는 미적 경험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예전에, 예술에 관심이 그다지 없는 공대생인 친언니와 미술관에 갔을 때, 작품 앞에서 서성이는 나를 보고 언니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너는 도대체 이 앞에서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나에게 작품 앞에서 전형적으로 하는 생각의 루트 따위는 없다. 오히려 뭐든 느끼고 생각해보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천천히 다시 본다. 그러면 뭐라도 보이게 된다.
결국 태도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독일 철학자 헤르만 슈미츠는 미적 경험이 형성되기 위해서 ‘미적 태도’가 필수 조건이라 말한다. 그리고 ‘미적 태도’를 ‘미적 경건함’과 ‘미적 향유’라는 두 층위로 구별한다. 먼저, 미적 경건함은 감상자가 예술 작품이 보여주는 상황과 인상에 주목하고 그것들이 주는 독특한 감정과 분위기적 힘을 충분히 공감하기 위해 접어드는 ‘선-감정(pre-emotion)’의 상태를 뜻한다. 이어서, 미적 향유는 즐거움이나 만족감 같은 것인데 슈미츠는 이를 더 엄밀히 규정하고 있다. 나는 이 부분이 굉장히 흥미로웠다. 그는 미적 향유를 “정서적인 자극과 놀람의 상태를 유쾌하게 느끼고 수용하면서 유지하는 일”로 정의한다. 그러니까 미적 향유는 예술로부터 얻는 감정이나 분위기적 힘의 수용을 넘어서서, 그러한 상태를 계속 유지하려는 자발적인 동기까지 포함하는 상태이다.
미적 태도에 대한 슈미츠의 설명을 기억하면서 다시 미술관에 가거나 영화를 볼 때 등 예술 앞에서 나의 상태를 되짚어보자. 우리는 눈앞에 펼쳐지는 상황 그리고 나에게 다가오는 인상에 주의를 기울일 것이다. 그러다 나를 사로잡는 작품이 있다면, 그 감동을 계속 유지하고 싶어 한다. 그러면 어느 순간 완전히 압도되기보다는 이성적, 합리적, 객관적으로 감정의 근원을 더듬어 찾게 된다. 물론 완전히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는 없다. 그때 우리는 감정적 압도와 이성적 긴장 사이에 머물게 된다.
중요한 건, ‘공감, 수용하고 유지하려는 의지’가 있어야 그 단계에 진입한다는 것이다. (의지가 선행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인상과 감정은 이미 우리 주위에 있고, 주의를 기울이는 단계는 그걸 향유하기 위해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슈미츠가 이 부분을 강조한 건 아니지만 나는 자발적인 동기라는 말에 꽂혀버렸다. 미적 태도에 대한 슈미츠의 이론을 알게 됐을 때 내 경험이 서술된 것 같아서 신기했다. 더 재밌는 사실은 내가 아는 누군가는 슈미츠를 모르면서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는 거다.
이전 직장에서 <물방울을 그리는 남자>의 감독이자 음악가, 사진가 그리고 김창열 화백님의 둘째 아들인 ‘김오안(Oan Kim)’ 선생님의 인터뷰를 진행했던 때이다. 그는 감상자의 태도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예술 작품은 항상 우리의 이해에서 벗어나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어요. 그 정의하기 어려운 지점에서 매혹적인 힘이 생겨나요. 철학자 발터 벤야민이 예술작품의 ‘아우라’를 ‘가까이 있음에도 멀게 느껴지는 것’으로 정의한 것처럼요.
예술은 언제나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는 법이 없고 아주 멀리에서 도달한 것들이 있어요. 그리고 어떤 작품이 우리를 정말 감동시킨다면 그것은 스스로에게서, 즉 감상자로부터 오는 것이죠. 그러니 당연히 하나의 작품을 사람마다 다르게 받아들일 텐데, 저는 그 차이가 지각의 정도에 있는 것 같아요. 작품을 수용하는 여러 단계가 있는 거죠. 가장 먼저 의식적인 차원에서는 이야기나 멜로디 같이 서술적으로 전개되는 것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 정도 명확한 의미를 이해할 수 있어요. 보다 무의식적인 차원에서는 의식하지 않아도 부차적인 의미가 드러나고요.
마지막으로, 신체적인 차원이 존재해요. 머리가 아닌 우리 몸에서 느껴지는 감각적인 차원이죠. 어떤 음악을 들을 때 몸이 저절로 반응하거나, 작품에서 끌림 또는 불쾌감을 느끼는 것처럼요. 이런 것들은 보통 일상에서 느끼기 힘든, 말로 하기 어려운 감각이죠. 우선 느껴졌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결국, 인간의 경험은 언제나 유동적인 상태에 있고 예술 감상 역시 여러 차원을 오가며 다양하게 이루어지는 것 같아요.”
선생님의 대답을 듣고 너무 놀라서 혹시 헤르만 슈미츠를 아시냐 물었더니 모른다고 하셨다. 슈미츠는 신체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학자인데 그 부분을 언급한 것이나 미적 태도를 여러 차원으로 구분한 것, 마지막으로 감상자의 인지적 차원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모두 그의 이론과 맞닿은 부분이 있어서 기가 막혔다.
김오안 선생님의 기막힌 생각에 감탄하며… 나는 항상 그 모든 차원을 계속해서 시도하는 감상자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비단 미적인 부분 외에도 일상에서 그런 태도를 자주 가지려 노력한다. 하지만 매번 모든 것에 영민하고 예리하게 반응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태도나 감상적 의지는 ‘시간적, 심적 여유’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바쁜 현대인은 세상을 세심하게 볼 물리적 시간도, 그런 의지를 가질 마음의 여유도 거의 없다. 삶에 바쁘게 쫓길 때마다 나는 20년 초에 한 다짐을 떠올리려 노력했다. |